양무의 아들 이안사는 호걸풍으로 전주 관기(官妓) 하나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주사(知州事)가 전주 고을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山城別監)을 접대하기 위하여 안사에게 그 관기를 수청들기를 청하였다. 평소 지주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안사는 크게 노했다. 많은 기생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자신이 총애하는 기생을 수청들게 하는가라 하며 거부하였다. 그러자 지주사는 안렴사와 공모하여 이안사를 역적으로 음해하기 시작하였다. 그 구실은 전주이씨 3세 천상(天祥)의 묘가 기린산 왕자봉 밑에 있으므로 후손 중에 왕이 나와 고려 조정을 무너트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에 세간에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을 구실로 이안사에게 혐의를 씌웠다. 이러한 사실이 고려조정에 알려지면 꼼짝없이 역모죄로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안사는 병든 아버지를 업고 모든 식솔들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머나먼 강원도 삼척으로 도망을 쳤다. 그곳에 정착하여 살던 어느날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동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을 금(金)으로 만든 것을 써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더욱이 금으로 만든 관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한 묘책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 갈 일이 있으니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였다. 소 백(百)마리는 흰(白) 소 한(一)마리와 의미가 같으니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짚이 황금색이니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였다. 이가 그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로, 지금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양무장군의 준경묘(濬慶墓)인 것이다.
부친의 묏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삼척에서 차츰 자리를 잡고 살았으나 어느날, 이전에 자신과 갈등이 있었던 전주 지주사가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로 부임하여 삼척으로 순시를 나온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다시 짐을 꾸려 일족을 거느리고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덕원군 용주리로 도피하였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여진족의 천호(千戶)벼슬을 하면서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안사(穆祖)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翼祖)와 손자 이춘(李椿, 度祖)이 대대로 원나라 관리를 지냈으나, 춘의 아들 이자춘(李子春, 桓祖)은 원의 총관부 쌍성의 천호로 있으면서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왔다. 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용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성계는 1362년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여 고려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1392년 조선을 건국하여 왕에 올랐다.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으로 이양무를 묘를 쓰고 나서 마침내 5대 162년만에 조선조 창업의 태조(太祖)가 된 것이다.